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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지순례 아홉째날
2023-06-29 07:17:37
박재필목사
조회수   207

아마도 오늘 저녁에 올리는 이 일지가 이번 순례일지의 마지막일 것 같습니다. 내일 오전 중에 체코 프라하를 몇 군데 둘러본 후 저녁 비행기를 타고 귀국할 예정입니다.

오늘 아침 다소 쌀쌀하지만 아주 맑은 날씨 가운데 루터의 도시 비텐베르크를 떠나 독일의 중세도시 드레스덴에 도착했습니다. 원래 계획은 비텐베르크를 빠져나오면서

루터의 참나무를 보고 오려고 했는데, 마침 정원이 공사 중이어서 차 안에서 차창 밖으로 잠시 보면서 떠났습니다. 잠깐 스치면서 본 참나무는 루터 때부터 있었던 나무가 아닙니다.

루터가 학생들을 모아놓고 교회의 잘못을 규탄하면서 종교개혁의 당위성을 주장하는 열변을 토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황제에게 받은 파문장을 불태웠습니다. 그것을 행했던

자리에 후대 사람들이 참나무를 심어서 기념하고 있습니다. 황제가 보낸 문서를 불태웠다는 것은 우리 식으로 말하면 '역모'입니다. 그런데 루터는 그렇게 할 용기를 냈습니다.

루터하우스에는 황제가 보낸 파문장이 전시되어 있어서 제가 교수님에게 물었습니다. "루터 파문장을 불에 태웠는데 어떻게 이 문서가 남아 있습니까? 사본을 만든 것입니까?"

교수님의 답변은 아니랍니다. 파문장은 루터만 받은 것이 아니고 교회와 루터가 속했던 학교와 시청 등, 알려야 할 곳들에 동시에 전달했기 때문에 루터 자신이 받은 것을 불태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생명을 거는 행위였는데, 루터는 교회를 개혁하기 위해서 루터의 참나무가 있는 자리에서 그렇게 용기를 냈습니다. 

이제 비텐베르크를 뒤로 하고 약 2시간 가량 떨어진 드레스덴으로 향했습니다.

 

드레스덴은 루터와 관련이 있는 흔적은 없지만 중심부에 개혁교회의 상징과도 같은 프라우엔키르헤(Frauen Kirhe)가 있습니다. 독일어로 '프라우'는 여성이고, '엔'은 복수형이기 때문에

여인들을 위한 교회 혹은 마리아와 성령(독일어에는 관사를 쓸 때 성이 있는데 성령은 여성형을 씁니다.)을 위한 교회라는 뜻으로 그렇게 이름을 붙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교회가 있는

큰 광장 정면에는 거대한 루터의 동상이 서 있습니다. 이 교회는 오늘날 유럽의 평화를 상징하는 교회로 알려졌고, 이 지역의 상징적 건물이어서 엄청난 관광객과 순례객들이 광장과

예배당을 가득 매우고 있었습니다. 왜 평화의 상징이냐면, 2차 세계대전 당시 800년의 역사가 넘는 이 교회는 영국 공군의 폭탄 투하로 처참하게 무너졌었습니다. 독일 히틀러 군대의

폭격으로 영국은 런던을 비롯해 큰 도시들이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파괴가 됩니다. 영국 공군이 그에 대한 보복의 상징성으로 이 교회를 폭격하게 되었습니다. 다같이 기독교

국가들이기 때문에 교회를 폭격하지는 않는데, 영국은 분노에 차서 상징적으로 이곳을 폭격한 것입니다. 전쟁이 끝난 후 동독정부는 이 교회를 무너진 채로 방치했는데, 독일 통일 후

세계가 기금을 모아서 2004년에 외벽을, 2005년에는 내부의 복원을 완료했다고 합니다. 그때 이 교회를 폭격한 영국 공군조종사의 아들이 화해의 상징으로 기금을 내서 이 예배당

지붕쪽에는 금색의 십자가가 설치되었고, 지금은 세계 평화의 상징과도 같은 교회가 되었습니다.

이 예배당은 원래 11세기에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졌다가 종교개혁 당시 개혁교회가 되었고, 18세기(1727년)에 개혁교회로서는 드물게 중세시대에 바로크양식으로 지어졌고,

사암으로 지어진 건물로서는 세계 최대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암으로 지었기 때문에 변색이 빨라서 검은 부분이 많고, 또 전쟁 때 폭격으로 인해 화재가 나서 새카맣게 변한 돌들도

많습니다. 무너진 후 돌들을 보관하여 유적을 보관하는 특수한 방법으로 원래의 재료들을 가지고 있었지만 소실된 부분도 많아서 소실된 부분은 새로운 재료로 복원을 해서 예배당의 색이

새것인 부분과 옛것의 부분이 확연하게 구분이 됩니다. 예배당 안은 개혁교회와는 달리 마치 가톨릭교회 성단 안에 들어온 것처럼 장식도 많고, 오르간도 전면에 설치되어 있어서

교회의 신학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천주교회가 아니냐고 묻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개혁교회입니다. 

 

드레스덴을 떠나서 다시 두 시간을 넘게 걸려 체코의 수도 프라하에 왔습니다. 아, 우리는 얀 후스의 종교개혁지를 찾아왔는데, 프라하는 말 그대로 관광객으로 인해 인산인해입니다.

프라하는 도심 자체가 유네스크 지정구역이어서 강 건너편에서 내려 걸어서 들어가야만 했습니다. 그나마도 유럽의 청소년들이 수학여행을 오는 곳인데 수학여행 철이 지나서 관광객이

엄청 줄은 모습이라고 설명을 들었습니다. 종교개혁의 역사에서 프라하는 얀 후스(Jan Hus)의 도시입니다. 13세기, 14세기에 신성로마제국의 수도가 되었기 때문에 지금의 도시는

그 원형을 그대로 보존해서 마치 중세시대로 들어온 듯한 느낌을 줍니다. 합스부르크 왕가가 신성로마제국을 병합한 후 다시 수도를 빈으로 옮기는 바람에 프라하는 잊혀진 도시가 되었고,

변방으로 취급을 받아 1차, 2차 세계대전에서 아무런 공격도 받지 않아 우리나라 고려시대 때와 같은 시대에 지어진 엄청난 중세도시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습니다.

정말 기가막힌 역사의 아이러니입니다. 잊혀졌기에 보존된 도시. 

프라하는 14세기 카를 4세 황제에 의해 조성된 도시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오늘날 프라하를 찾는 관광객들이 반드시 찾는 바츨라프광장, 구 시가지 광장(구 시가지라고 하지만 14세기

이전의 구역이고, 신시가지는 14세기에 형성된 구역입니다.), 그리고 워낙 유명한 프라하의 천문시계, 베들레헴교회 등이 모두 카를 4세에 의해서 조성되었습니다. 특히 신시가지의 가장

번화한 구역에 있는 바츨라프 광장은 1918년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 선언, 1948년 사회주의 공화국 선언, 1968년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프라하의 봄 당시 소련 군대의 무자비한 진압,

그리고 1989년 소련과 동독의 붕괴 이후에 민주화가 이루어지는 벨벳혁명 등 체코의 역사 속에 꼭 등장하는 광장이 되었습니다.

이 광장 정 중앙에 얀 후스의 동상이 있고, 후스를 중심으로 후스파의 쇠락과 부흥을 보여주는 조형물이 거대하게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그만큼 후스의 영향력이 크다는 뜻이지요.

얀 후스는 마틴 루터보다 100년 앞서서 종교개혁을 했습니다. 얀 후스의 개혁과 깊은 관련이 있는 인물이 카를 4세 황제입니다. 카를 4세는 카를대학교를 설립하였고, 후스를 1409년에

교수로 임용했다가 1410년에 총장이라는 중책을 맡깁니다. 얀 후스는 종교적으로 이단으로 정죄되어 1412년에 추방이 되었다가 1415년 7월 6일에 화형을 당해서 죽습니다.

그때 재판장의 역할을 했던 인물 '요하네스 자카끌레'에 대해서는 지난 이틀간 루터와 아우구스투스수도원과 관련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얀 후스가 죽은 날이 체코에서는 국경일입니다. 왜 그럴까요? 체코인들에게 얀 후스는 단순한 종교개혁자가 아니라 국가를 선도하는 선생님과 같은 위치입니다. 그리고 나라와 국민의

미래를 내다본 선각자였기 때문입니다.

얀 후스가 총장으로 있던 카를대학교는 발전하여 이곳에서 하이델베르크대학, 라이프찌히대학 등으로 확장해가는 그 출발입니다. 

얀 후스는 1402년부터 베들레헴교회에서 설교를 했는데, 당시에는 모든 성경과 설교가 라틴어였지만 후스는 체코어로 성경을 번역하고, 체코어 찬송을 작사 작곡하고, 체코어로 설교를

해서 가톨릭교회와 충돌을 하게 됩니다. 그의 설교의 핵심은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서 일대 일로 서는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당시에 가톨릭교회는 성찬을 할 때도 사제는 떡과 포도주를

받지만 일반 교인들은 '단종성찬'이라고 해서 떡만 받아서 먹었습니다. 그러나 후스파는 "이종, 혹은 양종성찬"이라는 이름으로 일반 교인들도 사제와 같이 떡과 잔을 함께 받았습니다.

이런 것들이 기존 교회와 갈등이 되어 얀 후스는 소환이 되고, 재판 절차도 제대로 지키지 않고 화형을 당해서 죽었습니다. 얀 후스가 목회하던 베들레헴교회는 현재 카를대학교 경제학부가

관리를 하는데, 카를대학교 경제학부는 전통적으로 졸업식을 베들레헴교회에서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졸업식을 앞두고 준비를 위해서 일반인에게 공개를 멈추었다고 해서 우리 일행은

베들레헴교회 내부를 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제가 알기로는 마치 스위스 취리히의 성베드로교회처럼 아무 장식도 없는 단순한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나중을 기약하며 돌아서야

했고, 대신 교회 벽면 한 곳에 얀 후스가 1415년 7월 6일에 죽었다는 표식이 있습니다. 얀 후스는 죽기 전에 유언처럼 "서로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모든 이들에게 진리를 요구하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바츨라프광장에 있는 얀 후스와 후스파를 기념하는 거대한 동상 밑에  이 말이 체코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프라하의 상징과도 같은 또 다른 장소가 카를교입니다. 이 카를교는 약 500m 정도의 길이이고, 제가 직접 걸어서 건너면서 보니까 다리 양편으로 (정확한지 모르겠는데) 15개씩 30개의

성인들의 석상들이 서 있습니다. 이 카를교는  이전에 있던 카를교가 무너진 후 1357년 카를 황제에 의해서 다시 건축이 시작되어 1402년에 완공이 됩니다. 이 다리는 쇠가 사용되지 않고

오로지 돌로만 만들어진 초대형 대교입니다. 700년이 훨씬 지난 다리를 지금도 엄청난 사람들이 너무도 편하게 다니고 있다는 사실이 경이롭기까지 합니다.

다리 건축 당시에는 원래 다리 양편으로 성인 석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가 프라하를 점령한 후에 프라하 사람들이 개종을 거부하니까 강제로 다시

가톨릭으로 개종을 시키기 위해서 석상들을 다리 양 옆으로 설치하여 다리를 건널 때마다 그 한쪽의 성인의 기도문을 암송하게 했다고 합니다. 외우지 못하면 죽음을 면치 못했습니다.

개혁교회에서 가톨릭으로 강제 개종을 시키려는 의도였지요. 그리고 바츨라프 광장에도 개혁교회 후스파의 교인들이 개종을 거부하면서 목이 잘리는 참수를 당했고, 순교자 21명의 교인을

상징하는 뜻으로 바닥에 21개의 십자가가 새겨져 있습니다. 합스부르크 왕가는 400년 동안 프라하를 지배하면서 후스파를 척결하려는 시도를 끊이지 않고 했습니다.

그러나 후스의 교회개혁에 대한 영향력은 루터를 비롯한 유럽의 종교개혁자들에게 끼쳐서 세계사의 흐름을 바꾸는 분기점이 되었습니다. 후스와 성경번역으로 유명한 위클리프,

마틴 부처 등 먼저 개혁을 시도했던 분들이 계셨기에 후대의 종교개혁이 성공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도 성찬 시에 떡과 잔을 받게 되었잖습니까.  

황제와 교회의 파문에도 자신의 신앙적 신념을 지켜냈던 루터가 그랬듯이 얀 후스는 100년 전에 먼저 자신의 신앙적 신념을 지키려고 죽음으로 맞섰습니다. 

목숨을 걸고 흑사병 현장과 전쟁터에 나섰다가 결국 순교한 츠빙글리나 무수한 반대파를 뚫고 종교개혁을 확산시킨 칼뱅, 파문장을 불태우고 황제 앞에서도 "주님 제가 여기 서 있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나를 도우소서" 기도했던 루터, 그리고 화형 목전에도 신앙의 당당함을 보여준 얀 후스 등을 만나면서 생각했습니다. 나는 제대로 믿고 있는가.

말씀에 신념이 있는가. 그러면서 성도들에게 우리 개혁교회 선진들의 신앙처럼 살자고 독려하면서 앞으로 설교가 더 강해지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

솔라 스크립투라(Sola Scriptura). 그리고 얼마나 더 많은 날을 살지는 모르겠지만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고자 합니다. 솔리 데오 글로리아(Soli Deo Glo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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